예전에 어떤 정신과 의사가 선천성 조증 환자가 부럽다고 말하는 걸 스쳐 들은 적이 있다. 선천성 조증 환자란 매사에 그저 낙천적이고 마냥 명랑하기만 한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이다. 그때 난 너무 젊어서 의사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비관주의는 심오함이요, 발랄함이란 곧 경박함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음울한 성격은 진지하고 세련된 본성을 뜻하는 것이고, 밝고 쾌활한 성격은 삶의 본질을 통찰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다.
입에 달고 걱정을 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보통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하게 해결되기 마련이다. 세상을 회색 빛으로 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길한 예측이 늘 맞아떨어진다고 해서 비관주의를 현실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천성이 밝은 사람들은 위기에서 돌파구를 찾아낼 줄 안다. 그런 사람에게는 불행은 그렇게 심각한 궁지로 빠져들지 않고,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다. 반면 이렇게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으니 이것도 저것도 다 잘못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물론 그 생각이 맞을 지도 모른다. 만사를 우울하게 생각하기만 하면 분명히 더 나쁜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으니까.
쾌활한 성격은 대개 해피 엔딩을 부르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행복을 퍼뜨리게 되고, 사람들이 다들 그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면 사랑하는 즐거움은 더욱 커지고, 많은 사람이 느끼듯 인생이 그렇게 세속적이고 짐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난 이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하는데, 이렇게 많이 주는데 왜 사람들은 날 사랑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진실을알고 싶어한다면, 난 세 가지 이유를 들 수있을 것이다.
첫째로, 자기 희생은 결코 사랑을 얻을 수 없다. 감사의 마음은 몰라도 사랑은 얻지 못한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이란 것은 깊지도 않고 오래가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흔히 “저 사람의 자아가 별가치가 없으니까 저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겠지” 하고 쉽게 생각해 버린다. 그리고는 이런 생각을 하게된다. “자기 스스로도 별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줄 필요가 뭐 있겠어?” 하고, 사람들은 강인하고 자긍심 강하고 자립적인 사람들에게 끌린다. 남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일을 해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사람들에게 빚졌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랑을 얻는데는 별로 효과가 없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이중의 구속을 의미한다. 자발적으로 행동하라는 명령을 받는 순간,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이미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주고는 “그 대신 날 사랑해 줘”라고 요구한다면 결코 사랑받을 수 없다. 강요된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일 나쁜 것은 사랑이 없으면 못 살 것처럼 행동하는 일이다. 그것만큼 신경 거슬리는 행동도 없다. 받아 주면 점점 더 달라붙고 끈적끈적하게 행동할까봐 사람들은 겁을 낸다. 애정결핍증을 나타내는 사람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사랑을 쏟아부어도 마음속의 빈곳을 채울 수는 없다. 삭시가 그랬듯,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은 그 누구도 그런 덫에 걸리길 꺼려하는 지경에 이른다.
늘 새롭게 다시 깨닫고,
결심과 다짐을 반복하다 보면,
..... 언젠가 변할 수 있을까?